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NHK 홍백가합전 (문단 편집) == 기타 == * 홍백(紅白)이라는 단어는 [[겐페이 전쟁]]에서 유래한 단어로, 헤이안시대 말 [[겐지|겐지(原, 미나모토)]]와 [[헤이시|헤이시(平, 타이라)]]가 일본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 전쟁에서 源(미나모토)씨는 흰 깃발을 사용하고 平(다이라)씨는 붉은 깃발을 사용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실제로 홍백가합전은 두 집단으로 나눠서 경쟁을 하고 점수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으로 되어있다. * NHK 홍백가합전의 가(歌)가 [[훈독]](うた, =노래)이라 간혹 '홍백노래합전'이라고도 불린다. '홍백가요대전'이라고 의역한 책도 있다. * 1970년 홍백가합전의 토리 가수는 원래 미나미 하루오가 고려되었다고 한다. 당년도 만국박람회 테마송을 불렀기 때문. 하지만 모리 신이치의 '긴자의 여자'로 결정. 미나미 하루오도 가창곡을 ‘오다 노부나가’로 변경하였다. * 라디오로만 방송한 제1회(1951년)와 제2회(1952년)는 논외로 하더라도,[* 참고로 상술한 것처럼 1회는 남아있는 사진이 전무하나, 2회부터는 당시 무대를 담은 사진이 남아 있다.] 제3회(1953년)~12회(1961년), 15회(1964년)의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 이는 1959년에야 도입된 [[VTR]] 기기와 테이프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방송이 끝나면 다른 프로그램 녹화에 쓰기 위해 테이프를 재활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던 데다가[* 물론 1958년까지는 VTR도 없었기 때문에 방영 당시에도 녹화 자료를 남길 수가 없었다.] [[방송자료]]로서 녹화를 보존할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편의 TV 방송 영상이 남아있는 최초의 홍백가합전은 14회(1963년)이다. 그나마 제5회(1954년) 이후에는 라디오 녹음이라도 남아있으며,[* 다만 5회부터 7회까지의 녹음은 음성 일부가 잘려 전편의 녹음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홍백가합전은 제8회(1957년)이다.] 13회(1962년)는 뉴스 촬영 목적으로 녹화된 단편적인 흑백 영상이 있다. 여담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홍백가합전 컬러 영상은 16회(1965년)의 단축판이며, 그 이후로도 홍백가합전의 컬러 영상은 소실되거나[* 17회, 18회, 20회. 물론 이들은 컬러 무대 사진은 물론 흑백 영상도 온전히 남아있어 당시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 열악한 녹화만이 전해져왔으나[* 19회, 21회, 22회] 23회를 방송한 1972년부터 NHK가 홍백가합전의 VTR 보존을 결정함에 따라, 23회 이후의 방영분은 모두 컬러 영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 [[중국]]에서는 [[중국 중앙 텔레비전|CCTV]]의 '춘절만회'가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 의외로 출연료가 싼데, 1983년 제34회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적이 있는 유명 가수 우메자와 토미오가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7만엔[* [[뜨거운 형제들]]에서 [[사이먼 도미닉]]이 받은 출연료가 회당 70만원이었다고 한다.] 받았다고 폭로했다. [[https://news.nicovideo.jp/watch/nw3666204?news_ref=50_50| ]] 사실 한국도 음악방송 출연료가 회당 10만원 수준인 등 양국 방송계 전반의 문제인듯 하다. * 1970년대 후반 홍백가합전 무대 스테이지 조형물 보면 지금 2020년대에서 보면 한물 간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화려했던게 특히 1976년 제27회 홍백가합전 무대는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조형물이 압권이며 다음해 1977년 제28회 홍백가합전 무대는 중앙에 홍팀가수 VS 백팀가수 전광판이 인상적이었다 다음해 1978년 제29회 홍백가합전은 물고기 비늘을 연상케하는 조형물로 재현했으며 1980년 제31회 홍백가합전은 왕궁에서 볼법한 호화스러운 파티장을 연상시키는 스테이지가 압권이었다.[* 1976.1977.1978.1980 당시 홍백가합전 스테이지는 KBS가 열린음악회나 가요대축제에서 재현해도 원조랑 느낌이 다를것이다.] * 시청률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로 1972년부터 1984년까지 홍백가합전 연주의 지휘를 맡았던 밴드마스터[* 지휘자와 비슷하지만 보다 상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재즈의 [[빅 밴드]] 형식이며 리더와 연주자도 겸하는 보직. 기본적인 통솔 인원 수는 지휘자보다 적지만 때로는 그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인원을 통솔해야 할 수도 있다.]였던 '[[https://ja.m.wikipedia.org/wiki/%E3%83%80%E3%83%B3%E6%B1%A0%E7%94%B0|단 이케다]]'(ダン池田) 가 있다. 그가 홍백가합전에 처음 합류한 시점인 1972년에는 무려 10년만에 시청률 80%대로 복귀했으며, 마지막 해였던 1984년에도 78.1%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5년 방영을 1달 앞두고 급작스레 자리에서 강판당한 뒤 66.0%, 1986년에는 최초로 50%대인 '''59.4%''', 급기야 1989년에는 '''38.5%'''(1부)를 찍어버린다. 이후로도 계속 추락해 이제는 30%대도 겨우 사수하는 상황. 스타 가수들이 고작 1,2년 사이에 물갈이되지 않고 새로운 히트곡들도 계속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커리어가 프로그램의 흥망성쇠 그 자체였던 셈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와 그의 밴드였던 '뉴 블리드'는 1960년대 말부터 [[후지 TV]]의 전속이었지만 홍백가합전을 비롯해 NHK 등 다른 곳에서도 연주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이유는, 금기로 여겨지는 '''자서전에서의 연예계 뒷이야기 폭로 행위''' 때문이었다.[* 원서 芸能界本日モ反省ノ色ナシ.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3부작으로 나왔지만 이후의 것들은 그닥 잘 팔리지 않았다.] 가장 잘 나가는 밴드마스터였던 그의 이러한 돌발행동에는, 당시 시대 풍조와 신변 변화의 영향이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기존의 가요, 라이브 연주, 가창력 등 가수의 기본적 소양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밀려나고 대신 전자음향기기와 녹음 연주 등이 점점 대세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마이크도 1983년 이후부터 무선으로 대체하는 추세였으며 NHK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금 유선 마이크를 쓰였으며 1986년부터 완전 무선 마이크로 전환되었다.] 그의 밴드 역시 시대의 변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고 후지TV에서 16년간 출연하던 음악 프로그램인 [[밤의 히트 스튜디오]][* 유튜브 등에서 1970~80년대 초 노래 잘 부른다던 일본 가수들의 스튜디오 라이브 영상을 찾아보면 대부분 이 프로그램의 녹화본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가 종영하기에 이른다. 이후 방송사의 라이브 연주 축소화 경향에 반발하다가 후지TV와 마찰을 빚어 밴드마스터 자리에서도 내려오게 된다. 그래도 잔여 계약이 있다 보니 홍백가합전에는 계속 나올 생각이었는데, 그 NHK조차 라이브 연주를 대체해 나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그는 가수의 기본적인 실력과 인성보다 상품성과 효율이 우선시되는 풍조를 비판하는 책을 내게 된다. 하지만 결국 당대 스타들을 죄다 거론해 버린 데다 70만 부나 팔려버린 탓에 [[쟈니스 사무소|쟈니스]]를 비롯한 소속사들과 방송사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이후 업계에서 철저히 매장당해 잊혀져 버리고, 가수 육성으로 재기하려던 시도도 실패해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한편 홍백가합전 역시 이후로는 녹음 반주와 MR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가 예상한 대로 특색을 잃어버린 프로그램은 몇 년도 안 지나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홍백가합전도 [[빅 밴드]] 연주로 했던건 1990년 제41회 까지 하다가 1991년 제42회부터 녹음 반주,MR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빅 밴드를 통한 라이브 연주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2023년에는 [[쟈니 키타가와 연습생 성착취 파문|쟈니스 전 사장의 추악한 행적이 드러나면서]] 44년 만에 쟈니스 소속 출신이 등장하지 않을 예정이다. [[분류:NHK 홍백가합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